2011년 11월 30일, 여왕님 안녕 본 것들, 들은 것들2011. 12. 31. 23:48
한때 세상에서 시이나 링고가 최고인 줄 알았던 적이 있었다. 매력적인 외모와 철학과 섹시하고 공격적인 카리스마와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실력. 아, 나한테 이렇게도 어필할 수 있는 뮤지션은 링고 이상은 없겠구나 싶었던 때가 있었다. 나에게 그녀는 지독히도 세속적이고 천해서 더더욱 완전무결한, 유일한 여왕님이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그렇게도 나를 전율하게 했던 그녀의 음악은 조금씩 그 방향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도쿄지헨 2집 때부터였던 것 같다. 사실 뭐 그것까진 좋았다. 뭐 경험상 드문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냥 예전 맘에 드는 노래들을 들으면 된다.
지알이 스터디에서 우연히 만났던 링고 팬 후배가 언니, 링고 콘서트에서 욱일승천기 흔들었대요, 했을 때가 처음으로 내가 링고에게서 멀어졌던 때였다. 똑똑한 그녀이니 욱일승천기가 갖는 의미를 모르고 사용했을 리는 없다. 철학의 방향이 그 쪽으로 치우쳐 가는구나 싶어 약간 배신감이 들었지만, 똑똑한 애들이 이런 쪽으로 이상해지는 건 종종 있는 일이니 위화감은 없었다. 많이 사랑했으니, 여기에서 그친다면 한 번은 넘어갈게 싶었다.
올해 홍백에 그녀가 처음으로 출전하게 됐다는 소식에 오랜만에 두근거리며 신곡을 들어봐야지 싶어 검색했다가, 도쿄지헨 5집 앨범 '대발견'과 타이틀곡의 PV에 온통 욱일승천기가 난무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충격 아닌 충격에 휩싸인 채 나는 이 글을 쓴다. 이 소식을 전한 블로거는 자신을 더 이상 링고의 팬이 아니라 선언했다. 그 포스트에 달린 댓글 작성자들 중 통역 일을 한다고 밝힌 어떤 분은 자신의 동료 통역사로부터 링고가 한국을 싫어한다고, 그래서 절대 한국 공연만은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나는 아직 그녀를 완전히 버릴 수가 없다. 바로 작년까지도 가장 힘들 때 (극단적인 방식으로) 나를 위로했던 것은 도쿄지헨의 투신자살기도였고, 마루노우치 새디스틱 라이브 버전을 들을 때마다 미래의 공연장에서 열광하는 나 자신을 상상했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그녀의 음악을 가끔 들을거다. 그러나 이전의 내가 나 자신을 완전히 함몰시킨 채로 그녀를 들었다면, 이제는 아마도 이성이 먼저 나타날 것 같다. 그리고 혹시라도 누군가가 시이나 링고 좋아하세요? 라고 물으면, 나는 대답하기 전에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고 말 것만 같다. 격렬한 애정과 차가운 배신감의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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