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슬 본 것들, 들은 것들2013. 3. 31. 18:45
... "왜 좀 더 리얼하게 보여주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관객분들도 계세요. 그런데 [지슬]같은 영화는 당사자들이 여전히 생존해 계시는데, 그 분들이 기억하시는 것보다 더 아프게 찍기 싫었어요. 만약 더 아프고 더 충격적으로 찍는다면, 그 분들은 다시 그 날을 맞이할 텐데…. ... "그 날보다는 좀 덜한 게 낫지 않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 [지슬]에선 역사를 설명하려는 게 아니라 그런 아이러니컬한 시대상을, 그 시대를 경험하지 않은 세대들에게 감정적이면서도 복합적인 '충돌의 느낌'으로 전달하고 싶었어요. 판단은 관객의 몫일 테고, 감독의 입장에서 "그때는 무조건 슬픈 시대였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 같아요. 그 시대에도 웃음이 있었을 거고요. 저도 겪지 못했던 시대니까요. 이 영화에서 전제는 이런 거였어요. 앞 부분에 '신위(神位)'라는 중간 제목이 나오고 주민들이 감자를 먹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이 사람들은 귀신이다"라는 생각에서 찍은 거예요. 마치 그들이 제사상에 앉아 있는 사람들처럼요. 이 사람들은 이미 신령들이고 한라산의 영신(靈神)들인데, 그런 존재들을 데리고 영화를 찍으면서 인간들과 똑같은 관점에서 영화를 찍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했고요.
- 네이버 영화매거진 오멸 감독 인터뷰 중.
(http://movie.naver.com/movie/mzine/cstory.nhn?nid=1679)
... 선댄스 영화제(월드 시네마 극영화 경쟁부문 심사위원 대상)이후 “한국 독립영화의 쾌거”라는 기사를 보고 좀 의아했어요. 냉정히 말해 한국 독립영화가 제주에 미친 영향이 없었거든요. 인프라도 현장이 돌아가는 방식도 제주와 서울의 그것은 천지차이입니다. 많은 한국 영화가 제주의 풍경을 찍어갔지만 제주의 삶과 문화에는 관심이 없었죠. 갑자기 하나로 묶이니 당황스런 면이 없지 않습니다.
- 네이버 김혜리칼럼 '지슬이라는 신비롭고 외딴 섬'에 포함된 감독 인터뷰 중.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428&aid=000000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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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슬'은 분명 완벽한 영화는 아니다. 중후반부에 들어서면 관객의 감정선을 과도하게 건드리려는 몇몇 부분의 시도들이 신경을 거스른다. 그러나 그 점을 제외하면 이 영화는 매우 훌륭한 수준의 성취를 이뤄냈다. 감독 특유의 몽환적 영상미는 '지슬'의 가장 뛰어난 점 중 하나다. 동양화를 전공했다는 감독의 예술적 내공은 장면 하나하나마다 여실히 드러난다. 순덕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한 후 두 남자가 뛰어 돌아가는 산의 능선이 죽은 순덕의 나체의 옆 라인과 천천히 겹쳐지는 장면은 최소한 수 년간 내가 본 모든 영화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것이었다. (제주도의 땅과 여성성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감독의 의도는 일부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제주도의 여성성이 영화 내에서 너무도 세심하고 동시에 압도적인 방식으로 구현되어 있기 때문에, 불평할 마음도 엄두도 생기지 않는다는 게 솔직한 내 기분이다.) 내러티브의 구성과 각 인물들의 캐릭터를 살리는 세심한 연출 역시 돋보인다. '지슬'의 영화적 시선은 어느 한 캐릭터에 천착하지 않지만 그것은 오히려 이 영화의 강점으로 작용한다. 가히 지역예술의 불모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한국 예술계에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던, 지역문화와 지역주민들의 삶의 모습이 강조된 점도 좋았다. 예술성과 정치성과 지역성이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고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슬'은 수작의 범주에 속한다.
올해 들어 본 영화 중 단연 최고였다. 혼자 한 번 더 볼까 싶다. 가족들을 끌고 갔더니 마음대로 울 수도 없었고 엔딩크레딧도 다 못 보고 나옴. 엔딩크레딧 무조건 봐야 되는 건 아니지만 이 영화는 그래야 할 종류의 것이었거든. 중간까지 안 울고 괜찮았는데, 영화 중반부쯤에 갑자기 이 영화를 본다는 행위 자체가 희생자들에 대한 위령제로서의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졌다. 제주도 곳곳에서 지방이 타들어가 사라지는 엔딩을 보면서 두 손을 모았던 건 그래서였다.
여담이지만 극장가기 전에 엄마가 영화의 배경을 이야기해 달라길래 제주 4.3사건에 대한 거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럼 이념영화네?"라는 대답이 돌아왔고 그 순간 뭔가 더 설명할 힘이 빠져버렸다. 괜히 다같이 보자고 했나 싶었다. 그럼에도 가족들에게 이 영화를 소개한 건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공유와 소통이 말처럼 쉬울 것 같으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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