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해와도 같았던 3년의 연애는 회피에 이은 침묵으로 끝났다. 연구조교를 맡았던 교수의 기이한 언행들과 관련된 구설수로 인해 대학원에서의 내 입지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학과장은 나를 몇 번이나 호출해 감정적으로 분노를 표출하며 상황 설명을 요구했다. 지난 겨울에 지원했던 학교들은 좋은 결과를 주지 않았다. 내가 가장 그를 필요로 했을 때 지도교수는 내게서 등을 돌렸다. 다음 해 입학을 위한 지원이 가능한지, 아니 애초에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가족들에게는 이야기할 수 없었다. 말이 퍼질까 두려워 친한 대학원 동료들에게도 의논할 수 없었다. 지혈할 틈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내부의 상처들을 끌어안은 채, 나는 온 몸에 가시를 세우고 그 모든 외부적 상황들에 대처해야만 했다. 사회적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추천서를 받기 위해 신청한, 내 전공도 아닌 수업들에 수동적으로 출석하는 날이면 여기 앉아 있는 교수와 학생들이 뒤에서 나를 욕할지도 모른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매일 밤 침대에 누워, 잠든 동안 내 존재가 조용히 소멸해 사라지기를 끈질기게 소망했다. 몸이 견디지 못한 건 당연한 결과였다. 한창 기말페이퍼 작성에 열중해야 했던 12월 초에 입원이 결정됐고 수술 날짜가 잡혔다. 당시의 나에게 외부와 어느 정도 격리된 병원은 차라리 편안한 공간이었다. 그 편안함은 그토록 바라던 고요한 죽음에 가까운 것이었다. 삶을 위해 찾은 병원에서 나는 죽음을 가장 가까이 느꼈다.
퇴원하고, 교수들을 찾아가 상황설명을 하고, 늦은 지원을 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사이 어느새 해는 바뀌어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과분한 학교로부터 적지만 어엿한 장학금과 함께 입학허가서가 담긴 이메일이 도착했을 때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 모든 시간들이 지나고 지금이 왔다.
이 매일매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당신은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