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유명 문화평론가의 글이 섹시하다는 얘기가 있길래 찾아 읽어봤는데, 미하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와 포크너의 '에밀리에게 장미를'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한 글을 보고 식겁했다. 2004년에 쓴 글이니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건 너무하다 싶기도 했지만 외부기고는 2000년부터 했던데. 요즘 쓴 글들도 확 필이 오는 건 없더라. 그냥 성실하고 부지런한 글쟁이라는 느낌. 영문학 박사과정에 있다는 프로필을 보고 납득함.
나는 섹시한 글을 쓰는 사람이 좋다. 내가 그렇게 못하고 또 그럴 수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 물론 그런 위치에 없었어도 나같이 지리한 인생을 살아온 인간은 섹시한 글 같은 건 못 쓴다. 그냥 잘 쓰는 것과 섹시하게 쓰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다. 그것은 완전히 진보적인 것과도, 완전히 현학적인 것과도 다르다.
생각과 글의 섹시한 정도가 언제나 일치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경우는 정말 드물다. 유명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P모씨는 생각이 아주 섹시하지만 글은 지나치게 정갈하다. 이건 기자들의 어쩔 수 없는 특성인 것 같으니 뭐 어쩔 수 없지. H모씨는 솔직하기는 한데 생각도 글도 섹시하지는 않다. 얼굴은 남자답고 섹시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 같더라만. 자뻑으로 상대방을 피로하게 만드는 타입.
내가 사적으로 잘 아는 사람 중에 그런 자뻑인간이 있다. 분하게도 그는 생각도 말도 글도 섹시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심지어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스스로를 비참하게 여겨야 하나? 내가 병아리였던 시절에 중닭 정도의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에 대한 동경이란 무섭다. 혹시 석사 첫학기생이 대학원에서 중요한 게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없이 누군가를 함부로 동경하지 않는 것이라 말하겠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잘 지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이건 그와 나의 사적인 관계와, 그 관계에 얽힌 내 감정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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