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6 2021 일상2021. 5. 7. 07:07
언젠가 망설임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다. 포스트-포스트모던 시대의 망설임과 주저에 대해. 인종과 젠더를 엮어도 좋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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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의 7월에 적었던 글. 수정 좀 하고 싶었는데 다른 거 하다가 시간 너무 지나서 걍 저장이나 해두기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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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주 월요일 미국 국토안보부 산하 이민세관단속국(ICE)은 국제학생들이 가을학기 온라인 수업만을 수강하게 될 경우 학생비자를 박탈하고 미국 내 체류를 허가하지 않겠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이는 팬데믹 이래 트럼프가 꾸준히 시도하고 있는 미국 내 경제/사회 정상화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문제는 코비드 감염자의 실제 증가추이를 봤을 때 너무 성급하게 진행되고 있는 이 정상화 과정에서 학교들을 강제로 리오픈시키기 위해 잡은 볼모가 국제학생들이라는 점이다. 외국인 차별을 통한 자국중심주의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면서 본인의 국가정책적 필요 역시 충족시키는 일석이조의 아이디어다. 아마 매우 머리가 좋은 사람이 만들어냈을 것이다.
오전에 뉴스를 확인하고 구글과 SNS를 떠돌아다니며 새로운 소식을 검색하고 학생들의 반응을 보고 동료들과 걱정어린 연락을 하고 학교에 이메일로 문의하며 안내를 기다리는 몇 시간 동안 이 곳에서 운좋게도 느껴본 적 없던 '보호받지 못하는 느낌'을 처음 느꼈다. 누구는 지도교수가 안심하라는 이메일을 보내줬다고 하고 탑스쿨 총장들은 불과 몇 시간 뒤에 정책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는데 애초에 우리 영문과에는 외국인이 극소수여서 딱히 기대도 안했고 거기다 탑스쿨도 아니니 총장 명의로 성명내는 데 며칠 걸리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 모든 논리적인 생각의 귀결들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안내메일이 오기 전까지의 그 몇 시간 동안 나는 불안했고 그 불안은 대단히 '공적인' 성격의 것이었다. 국가가 나라는 존재를 하찮게 여기고 있다는, 일종의 공적 보호장치의 부재에 대한 불안이었다. (한국에서 나는 거의 아나키스트에 가까웠는데 미국에서 짧지 않은 시간을 사는 동안 꽤 국가주의자가 되었다.)
2. 한국 여성들에게 이런 공적 보호장지의 부재에 대한 불안은 매우 익숙한 일일 것이다. 당장 ICE 정책발표 하루 전날 한국에서는 세계 최대 아동성착취물 사이트 운영자 손정우의 미국 송환이 불허됐다. 여러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비극적인 결과였다. 이미 형기를 마쳤기 때문에 재판이 끝나는 순간 일반인 신분이 된 그와 그의 아버지가 재판소를 걸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느낀 박탈감을 한국의 많은 여성들도 똑같이 느꼈을 것이다. 적어도 이 사건에서 국가와 법은 성범죄 가해자를 감쌌고 피해자들을 충분히 보호해주지 않았으며, 손정우의 재판 직후의 사진은 그러한 공적 보호장치의 부재의 감각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이미지였다.
그리고 사흘 전, 전 서울시장 박원순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나는 그를 잘 모른다. 그가 인권변호사와 사회운동가로 본인의 커리어를 시작했으며 당시 한국 최초의 성희롱 소송을 비롯한 여러 성범죄사건에 변호인으로서 참여했다는 사실, 그리고 서울시장으로 재직한 이후 논란의 여지가 있을지언정 서울시민의 삶에 나름의 긍정적 기여를 했다는 정도의 것들만 알고 있을 뿐이다. 좌파 운동권/인권운동가 출신의 남성들이 본인의 순수한 이상 아래 쌓아온 자신의 커리어와(이상으로 채색된 커리어인지 커리어로 채색된 이상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자신도 모른 채(정말 의문스럽지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더라) 쌓아온 과오의 충돌을 견디지 못하고 공적 공간에서 추방당하거나 심지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케이스가 몇몇 있어왔다. 심지어 이를 주제로 한 학술저서도 미국에서 출판되었다고 하니 연구해볼 만한 한국적 특이점이라는 건 확실한 모양이다.
3. 일련의 사태들로 인한 극심한 피로감을 해소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다. 애도는 개인이 취사선택해 받아들인 타인의 서사에 기반하여 이루어진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독자 개인으로서 이제 성공한 이상주의자 남성 집단의 파멸 서사는 지겹다고 느낀다. 반복에 의해 생성되는 보편틀의 잔가지들을 배제한, 절대적 보편의 개념을 믿지 않는 문학연구자로서 그 특정 집단은 이제 시대적으로 선택받지 못하는 종류의 서사에서 필연적으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말하겠다. 필연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너무나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서사를 받아들이는 것이 말 그대로 그들의 공적/사적 생존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이 바로 그 실례가 아닌가? 또는 사적 생존을 희생함으로서 결과적으로 어느 정도의 공적 생존을 이뤄낸 셈이니 나름 지능적이라고 말하면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친 생각인가?
인간인 이상 어차피 치우칠 수밖에 없다면 피해자 입장으로 치우치는 게 맞다. 다시 애도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자기애로 남는 애도는 실패한 애도다. 일부 연구자들이 애도의 권리를 알맹이도 없는 온갖 현학적 장광설로 눈물겹게 방어하는 모습은 그들에게 애도가 자기애의 표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극명히 보여준다. 학문의 권위를 자기방어의 도구로 사용하는 행위야말로 인문학 연구자가 가장 피해야 할 태도다. 이번 사건의 피해자분이 건강히 회복하시길, 사건에 관련된 모든 의문점이 해결되기를, 나아가 모든 성범죄 피해자가 국가와 법으로부터 내쳐지는 게 아니라 '보호받는 느낌'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하루빨리 오기를 바란다.